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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韩]日面:正信正行
    學校法人 東國大學校 理事長 日面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데는 상호 신뢰하는 믿음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의 삶과 수행은 일상 지어가는 행위 즉 업(業)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업은 크게 몸과 말과 뜻의 신구의(身口意) 삼업으로 묶기도 합니다. 삼업으로 하는 바른 행은 바른 믿음이 바탕이 됩니다. 바른 믿음은 모든 수행의 토대이며, 믿음에 의한 발심 수행은 생사업을 버리고 해탈업을 이루어 끝내 열반을 증득하게 합니다. 생사의 괴로움을 여의고 열반의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발심 수행의 원동력이 바른 믿음인 것입니다.
      불교가 처음 한국에 전래되었을 당시 신라의 원광법사는 나라의 이상적인 청년상으로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게 된 원동력이 된 화랑들에게 오계를 설하여 지키도록 했습니다. 이 오계를 화랑오계 또는 세속오계라고 합니다. 불교에 기본 오계가 있는데, 세속인이 지키는 계율로 다섯 가지를 설정한 것입니다. 그중 하나가 붕우유신(朋友有信)입니다. 벗들 사이에는 믿음이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벗을 믿지 못하면 벗에게 믿음이 가지 못하게 하며, 벗에게 믿음을 가지지 못하게 하면 벗을 믿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러면 좋은 관계가 깨어집니다. 사회에서 지도자를 믿지 못하고 지도자가 따르는 이들에게 신뢰가 가지 못하게 하면 사회가 혼란스럽게 됩니다. 물건을 사고 팔 때도 파는 이를 믿지 못하거나, 고객을 믿지 못하게 하면 매매가 성사되기 어렵습니다.
      믿음과 상반되는 불신인 의심은 상황을 잘 몰라서, 자신의 행동이 따라가지 못해서 이해가 안 될 때도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과 행위. 행위와 믿음은 둘이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정행(正行)이 정신(正信)과 다르지 않으니, 정신에 의해 정행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또한 정행에 의해 정신이 깊어집니다.
      불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바른 정행은 부처님의 신구의 삼륜(三輪)을 닮아, 부처님같이 될 수 있는 원행이라 하겠습니다. 즉 정행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깨달음을 향해가는 수행으로서, 보살의 자리이타 원행입니다. 생사업을 버리고 해탈업을 짓는 것이 정행입니다.
      바른 믿음에 의해 바른 행위가 이루어지므로, 무엇을 믿는가는 어떠한 삶을 사는 가라는 수행의 길과 직결됩니다.
      『화엄경』에서는 바른 믿음을 얻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의심을 풀어주며(「보살문명품」) 의심을 해결한 보살의 믿음에 의한 바른 원행을 설하며(「정행품」) 신심의 공능을 설하는 품(「현수품」) 등을 위시하여, 믿음에 대한 많은 가르침이 펼쳐져 있습니다. 신심의 공능을 설하는 「현수품」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습니다.
      신심은 도의 근원이고 공덕의 어머니라 信為道元功德母
      모든 선한 법을 길러내며 長養一切諸善法
      의심의 그물 끊고 애정 벗어나 斷除疑網出愛流
      열반의 위없는 도 열어보이도다. 開示涅槃無上道
      이는 성불을 향해가는 모든 보살행은 공덕행인데 그 공덕을 지을 수 있는 근본이 신심이며, 믿음에 의해 일체 의심이 끊어지고 열반의 길을 걸어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의심이 없어져야 믿음이 생길 터인데 여기서는 믿음에 의해 의심도 끊어진다고 합니다. 이 게송은 제가 이사장으로 있는 동국대학교의 법당인 정각원 주련에 새겨져서 법당을 출입하는 불자들에게 항상 믿음을 증장시킬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경에서는 믿음은 공덕의 종자이고 보리수를 생장케 하고 지혜를 증장시켜 부처로 출현하게 한다는 너무나 중요한 말씀을 게송으로 설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썩지 않는 공덕의 종자 信為功德不壞種
      믿음은 보리수를 생장케 하며 信能生長菩提樹
      믿음은 수승한 지혜 증장케 하고 信能增益最勝智
      믿음은 온갖 부처 시현하도다. 信能示現一切佛 (「현수품」)
      이처럼 성불하고 부처로 출현하는 것이 바로 믿음에 의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경 목표인 성불의 바탕이자 첫 출발이면서 또한 정행과 끝까지 함께하는 수행 그 자체가 또한 믿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화엄경』에서는 이 신심에 대한 설법을 부처님의 발바닥 광명으로 보이고 있습니다. 신심이 길을 떠나기 위해 발바닥을 땅에 딛고 일어서는 것에 비유된 것입니다. 걸음걸음에 발바닥은 항상 바닥을 딛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면 신심은 무엇을 믿는 것인가? 불교의 신앙대상은 무엇인가?
      첫째, 불·법·승 삼보를 믿습니다. 불보· 법보· 승보의 삼보를 믿어야 불자입니다. 삼보에 스스로 귀의함으로써 불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회나 법요식 때면 언제나 삼보에 귀의하는 삼귀의로 시작합니다. 불교에서 얼마나 믿음이 중요한지는 불자들의 기본 마음가짐이고 스스로 귀의하는 자귀계인 이 삼귀의만 보아도 알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귀의란 지심귀명례, 지심정례, 南無라고도 합니다. 나무는 manas의 음사입니다. ‘돌아가 의지한다’, ‘지극한 마음으로 목숨을 다하여 예경한다’, ‘지극한 마음으로 이마를 조아려 절한다’ 등으로 말하는 귀의는 진실한 바른 믿음이 없으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삼보중 먼저 거룩하신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피를 믿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지혜와 복덕이 원만구족한 존귀하신 분이라, ‘귀의불양족존’이라고 예경해왔습니다. 조석예불의 칠정례에서는 ‘삼계도사 사생자부 시아본사 석가모니불’과 ‘시방삼세 제망찰해 상주일체 불타야중’에게 지심귀명례 하고 있습니다.
      다음 부처님의 거룩한 가르침을 믿습니다. 일체 하고자하는 욕망을 여읜 청정한 부처님법이라 ‘귀의법이욕존’이라고 예경해왔으며, ‘시방삼세 제망찰해 상주일체 달마야중’에게 지심귀명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바르게 살면 부처님처럼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음을 믿습니다. 사성제와 연기법으로 깨달을 수 있음을 믿으며, 보살의 자리이타 바라밀행으로 성불함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룩한 스님들을 믿습니다. ‘귀의승중중존’이라 하여 대중가운데 높은 스님, ‘시방삼세 제망찰해 상주일체 승가야중’에게 예경합니다. 이처럼 불자들은 삼보를 믿고 귀명정례합니다.
      둘째, 우리의 본래마음을 믿습니다. 삼보를 믿고 수행하는 모든 행위의 주체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이며, 어떤 마음이 어떤 마음을 믿는가라고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바른 신심에 의해 바른 행이 나오고, 청정한 마음에 의해 청정한 행이 나오며, 지혜심에 의해 지혜행이 나오며, 자비심에 의해 자비행이 나옵니다. 부처님처럼 될 수 있는 바른 행은 바로 부처님처럼 될 수 있는 가능성인 불성을 확고히 믿음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중생들에게 부처님의 지혜가 본래 갖추어져 있음을 철저히 믿음에 의해서 지혜가 발현됩니다. 자기 마음의 분별하는 지혜가 일체 제불의 근본 부동지불과 본래 하나인, 자기 자신에게 본래 구족되어 있는 부처님과 똑 같은 지혜마음을 믿습니다. 자신의 자성청정심을 믿는 것입니다
      널리 회자되고 있는 선재동자의 구법이야기에서 선재동자가 처음 만난 분이 문수보살입니다. 문수보살은 대지 문수, 즉 보살중 지혜가 제일인 분으로서 중생들에게 신심으로 발심하게 해주는 보살입니다. 문수보살은 선재동자가 과거세 심은 선근이 깊어서 선법을 지어 신심이 깊은 줄 알아보고 선재로 하여금 선근과 신근에 의해 발심케 합니다. 이처럼 발심한 보살의 지혜는 신심의 지혜이고 그 신지(信智)로 바라밀행을 거쳐 증득한 지혜인 부처님의 일체지(一切智)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발심 수행에 의해서 다만 그동안 망상 집착 때문에 알지 못하고 보지 못했던, 자신에게 구족되어 있는 부처님의 지혜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화엄경』에서는 또한 신심이 원만구족하여 발심하면 바로 정각(初發心時便正覺)이라고도 합니다. 신심 발심 이후 펼치는 온갖 수행방편은 오로지 중생을 위하는 이타행이 되고 불국토 장엄행이 되는 것입니다. 수행의 계위를 점차로 밟아 올라가는 차제 수행은 물론, 발심하는 첫 자리에서 모든 계차를 단박에 뛰어 넘는 원융수행도 있습니다. 처음과 마지막이 둘이 아닌 경지인 것입니다.
      선재동재가 법계에 들어가는 입법계(入法界)의 여정은 문수보살에게서 발심하여 보현보살에 이르기까지 53선지식을 역참하는 것으로 되어있는데, 실은 선재동자가 문수보살을 만났을 때 이미 입법계한 것입니다. 또 문수보살의 가르침으로 처음 찾아간 덕운 비구 선지식에게서 염불해탈문을 접하는 순간 입법계했다는 것입니다. 선재동자의 구법여정은 중생계가 끝없어서 중중무진 해탈경계를 펼쳐보이는 남순(南巡)인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보현보살에게서 입법계의 여정이 끝나기 직전 다시 한 번 문수보살을 만나게 되는데, 그 때 문수보살은 선재동자의 선근과 신근을 또 한 번 칭찬하면서, 신심에 의한 지혜와 증득에 의한 지혜가 둘이 아님을 보여주고도 있습니다.
      셋째, 스스로 본래 부처임을 믿습니다. 부처님께서 반열반 하실 때 제자들에게 “자귀의 법귀의, 자등명 법등명”의 유훈을 남기셨습니다. 중생이 본래 부처임을 믿는 마음을 청정한 믿음이라고 합니다. 청정한 믿음(淨信)이 바른 믿음(正信)인 것입니다. 처음 시작이 마지막과 둘이 아니고, 설사 육도를 아무리 돌아다닌다 하더라도 자기 부처자리를 본래 떠난 적이 없음을 믿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서 본래성불이고 예부터 부처이며 중생이 부처이며 자체불임을 믿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중생제도는 중생 자기 미래불이 지금 자기 중생을 제도하는 것입니다.
      의상스님(625-702)은 이 경계를 “가도 가도 본래자리, 도달하고 도달해도 출발한 자리 (行行本處 至至發處)”라고 천명하였습니다. 꿈에 30역을 돌아다녔는데 깨어보니 누워있던 본래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외에도 신심과 수행에 대한 무진장한 가르침을 만날 수 있겠습니다만, 여기서는 삼보와 마음과 본래불의 세 가지로 정신과 정행의 관계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이 세 가지도 전혀 다른 것은 아니겠습니다. 『화엄경』에서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이 차별이 없다. 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 라고 하였듯이, 삼보가 마음이고 중생이마음이며 마음이 부처입니다.
      끝으로 다시 한 번 부연하자면, 정신에 의해 정행이 이루어지고 정행에 의해 정신이 점점 돈독해집니다. 그것은 집을 지을 때 토대가 되는 터를 잘 닦아야 고층 건물을 지을 수 있고, 고층 건물이 잘 지어진 것을 보면 고층 전체를 다 받쳐주는 토대가 튼튼함을 알 수 있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바른 믿음에 의해 신구의 삼업으로 짓는 모든 행이 지혜의 발현이고 해탈행이며, 일용사가 불사 아님이 없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나무 석가모니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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